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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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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복한성의 모습

    김복한 (金福漢, 1860~1924)

    김복한은 33세인 189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로, 이듬해에는 사서(司書)에 제수되었으며, 성균관대사성․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894년 승정원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6월에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기울어 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자정(自靖)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다가 1895년 8월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홍주에서 이설, 안창직, 안병찬 및 임한주, 이근주 등과 을미사변 직후부터 기병을 계획하였다. 홍주의병은 1895년 4월 안창식의 거의 시도에서부터 비롯하여 점차 구체화되다가 8월 20일 국모가 시해당한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이 비참한 소식에 접한 이세영, 박창로, 정제기, 송병직, 조병고, 김정하 등이 이세영의 집에 집결하였다. 여기에서 군사모집, 무기수집 등의 구체적인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졌던 홍주의 관찰사 이승우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시일을 끌던 중 11월 15일 단발령이 시행되자 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인근 유생들과 연락하여 그 이듬해 1월 1일에 홍주성을 검거하면서 본격적인 의병진을 편성, 의병투쟁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하여 향회(鄕會)를 1896년 1월 12일 화성의 강변에 사는 이인영 집에서 실시하였는데 여기에는 100여명에 이르는 홍주 일대 유생들이 참석하였으며 군사활동을 결의하였다.

    홍주의병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은 김복한 동문이나 제자 혹은 일대의 농민들이었으므로, 홍주의병은 그의 정신적 영향 아래서 태동했다. 그러므로 김복한은 을미 홍주의병의 의병대장으로, 당시 한말의 지식층 집단인 유생들의 흠모를 받는 홍주 일대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할 수 있다.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홍주의병에 인근지역에서도 호응하여 1월 15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의 이봉학․이세영․김정하 등 수백명이 나그네 또는 장사꾼으로 가장하고 성안에 숨어 들었다. 1월 16일 박창로가 사민 수백명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가 정인희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였다. 이들의 군세는 홍주부를 위압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무렵 김복한․이설․홍건 등 전직 고관들이 합세하였는데, 김복한은 이미 이승우에게 거의할 것을 권유한 바 있으며 안병찬․이봉학․이상린 등 지방유생들과 비밀히 연락을 위하여 거의를 권유․고무시켜 왔었다. 그리하여 1월 16일 수백 명의 민병이 관아에 집결하였을 때 김복한이 지도자로 추대되고, 김복한 등의 지시에 의하여 민병들이 경무청을 부수고, 아전 강호선, 함인학 등을 결박 구타하였다. 여기에 그 동안 창의를 이리저리 회피하던 관찰사 이승우까지 형세에 밀려서나마 가담하여 홍주성 내외는 의병의 함성으로 떠나갈듯 하였다.

    뒤이어 ‘존화복수(尊華復讐)’의 기치를 세우고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였으며, 김복한이 수석으로 추대되었다. 김복한은 홍주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각 호마다 의병에 응모할 것을 독려하고, 관찰사 이승우는 ‘홍주목사겸창의대장’이란 이름으로 관내 절제사에게 명하여 당일로 군사를 모집하여 오게 하였으며, 이설을 불러 장계 및 각국 공사관에 발송할 격문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월 17일 애초부터 의리에 따라 죽을 마음이 없었던 관찰사 이승우는 전승지 송인회, 아전 강호선, 함인학 등의 중지 요청에 따라 배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동지였던 김복한, 이설, 홍건, 안병찬 등 총 23명을 구금하였다. 김복한은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어 성균관장․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상소하여 왜적과 역적들을 토벌하지 못하였다 하여 사퇴하였다.

    이후 김복한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설과 함께 이지용(李址鎔)․박제순(朴齊純)․이완용(李完用) 등 5적의 참수를 간청하는 소를 올리다가 투옥되었다. 1906년에 민종식(閔宗植)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07년에도 의병은닉과 민심선동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공주로 압송되는 도중에 일본순검에게 무수히 구타당하고 어렵게 목숨을 건졌으나, 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평생 동안 식사와 용변을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게 되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병탄된 뒤로는 일제의 심한 감시 속에 두문불출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문인 박경호(朴敬鎬)를 상경시켜 유림대표들과 협의하게 하였고, 영남의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호서의 유림을 대표하여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발송하였다. 뒤에 발각되어 모두 일본경찰에 붙잡혔는데, 옥중에서 중병으로 9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1년에는 인지서재(仁智書齋)를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다. 인지서재(仁智書齋)는 김복한이 62세가 되던 1921년 세운 서재로 홍성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에 거처하면서 수백명의 문인을 배출한 곳으로, 호서 유림계의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김복한은 "왜적이 망하거든 나의 영혼 앞에 왜가 망했다는 사실을 전해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24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 민종식의 모습

    민종식 (閔宗植, 1861~1917)

    민종식은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정산(定山)면 천장리에 은둔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민종식은 정산에서 극비리에 동지를 규합하고 가산을 털어 무기를 구입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906년 3월 15일 대흥군 광수면 광수장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성으로 쳐들어갔다. 이것을 제1차 광수의거라고 한다. 그러나 소수의 병역으로 거사하는 것은 도리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것을 홍산재기(1906년 4월 20일)라 한다. 처음 그는 전북 여산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진안․장수․용담․무주 등지에서 많은 장정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을 이끌고 청남․서천․남포를 거쳐 홍산에 와서 의기를 들었다. 이때 모인 의병장 중에는 유준근․이용규․이세영․정재호․곽한일․채광묵․박윤식․김덕진․황영수 등 유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처의 의병에 의하여 조직된 연합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홍산(鴻山)에 집결한 의병은 여기에서부터 서천(舒川)․비인(庇仁)․판교(板橋)․남포(藍浦)․보령(保寧)․청양(靑陽) 등 충청남도 서부일대를 점령한 뒤,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洪州)를 공략하여 점거하였다. 홍주 남산에 이르렀을 때 의병은 5,000여명에 달했다. 이날은 홍주 장날이었고 홍주 4대문은 굳게 닫쳐 있어 쳐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날쌘 병정 두 명을 시켜 하수구를 찾아 들어가 4대문을 안에서 열었다. 대문을 연 두 병정은 신문천과 천학순이었다. 그러나 성안에 있던 일본군들은 성이 함락되기 전에 달아나고 없었다.

    홍주성을 함락시킨 민종식 대장은 부대를 재편성하고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 때 지도부는 대장 민종식을 비롯하여 참모장 이세영, 선봉장 이남규, 좌군장 홍순대, 참모 안병찬 등이었는데 지도부에 청양 유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홍성․보령․남포․비인․해미․부여․온양․예산 그리고 전북의 여러 고을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유림 이외에도 보부상들이 포함되어 있어 양반과 상인이 함께 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왜군이 점령 이튿날부터 성을 공격해 왔다. 왜군경은 5월 20일부터 28일까지 여섯 차례나 홍주성을 공격해 왔다. 의병들은 이들과 맞서 싸워서 이겼으니 이런 예는 드물었다. 성을 근 10일 간이나 지켰다는 기록은 한말 의병사상 홍주성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일제는 먼저 수원의 진위대 병사 57명을 파견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홍주성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고 싸우려 들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일제는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급파하여 홍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1개 대대 병력을 투입하였다. 한 전투에 이렇게 많은 병력을 투입한 예가 없었으며, 당시로서 최신무기를 갖춘 기관포대와 폭약반 그리고 기마대까지 딸려 보냈다. 일본군의 공격은 5월 31일 새벽 2시 30분 조양문에 폭탄을 터트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안의 의병은 야음을 타서 침입한 왜군을 향해 일제히 발포하였다. 시가전은 새벽 7시 30분까지 다섯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민간인과 의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민가에 불을 질러 홍성 전체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홍주성 전투로 민간인 1,000 여명이 학살당했고, 145명의 의병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체포된 145명은 의병이 아니었다.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민종식은 설상가상으로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다행히 민종식을 호위하던 포수 안덕인(安德仁)이 대장을 등에 업고 성을 빠져 나와 공주 이종원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 뒤 민종식은 상처가 차츰 아무는 것을 보고 예산군 대기동면 한곡리 전 참판 이남규의 집으로 몸을 숨겼고 동지들과 만나 재기할 계책을 세웠다. 재기 장소는 전북 무주 적상산이었다. 적상산은 험하고 장기전에 유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잔존 의병은 해상으로 산으로 이동하면서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민종식은 공주에서 은신 중 탑산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907년 평리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법부대신 이하영의 주청으로 감형, 진도에 귀양갔다가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악형의 여독으로 1917년 순국하였다.

  • 송병선의 모습

    송병선 (宋秉璿, 1836~1905)

    송병선은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19세기에 이르러 송병선의 큰 아버지인 송달수(1808~1858)가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작은 아버지인 송근수(1818~1902)가 여러 판서를 거쳐 좌의정까지 지낸 것을 계기로 가학을 주도하는 계파로 부상하였다. 그 결과 송시열송능상-송환기-송치규-송달수-송병선의 형식으로 송시열 가학의 전승 계보가 성립하였다. 따라서 청년기 송병선의 학문적 성장은 백부와 숙부의 활약에 의지하였다. 송병선은 큰아버지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고종으로부터 여덟번이나 대사헌의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는 등 권력에 초연한 채로 조선왕조 마지막 선비의 품위를 지켰다. 또한 송병선은 고종대의 마지막 산림으로 산림 본연의 학문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에 대한 책임감으로 한평생을 보냈다.

    송병선은 호락분열로 대표되는 학계의 문호분열과 학설시비를 지양하고 조선성리학의 구심점을 회복하여 외세의 침략으로 가중되는 현실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시대이념으로 모색하는 학술운동인 정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정학의 내용은 우선 오현(五賢) 즉 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송시열의 성리학을 시의에 맞게 훌륭하게 요약해 정학을 창조하여 당대의 학술을 통일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위정척사의 사상사적 맥락을 설명할 때 송병선의 정학운동은 하나의 시론적인 모델을 제공해 준다. 그 모델의 기본 구조는 학계의 호락분열에 대한 반성과 호락 이전 조선성리학 전통의 재발견, 그리고 이에 바탕한 정학의 역사적 재창조로 요약할 수 있다.

    1905년 11월 18일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식음을 전폐하고 ‘나라가 망하고 도가 망하였구나.’라면서 눈물을 흘리며 통분해하였다. 그는 곧 상소하여 적신들의 매국한 죄를 극론하고 엄형을 내리도록 하였고, 을사조약을 철폐할 것을 전하였다. 궁중에서 물러나온 송병선은 경무사 윤철규의 속임수에 속아 일본헌병에게 몸수색을 당하는 등 치욕을 겪고, 29일 유소(遺疎)를 지어 고종에게 제적(諸賊)의 참수와 늑약의 폐기를 유언으로 남기고, 시전방인민(示全邦人民)을 지어 우리 국민이 일심단합하여 경쟁세계를 헤쳐나가기를 당부한 후 30일 음독자결하였다. 그가 순국한 뒤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라 내려졌다.

  • 이상재의 모습

    이상재 (李商在, 1850~1927)

    이상재는 18세가 되던 1867년 서울에 올라와 과거를 치뤘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방거사가 되었다. 이에 개탄한 그는 세상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초야에 파묻히려 하였다. 그러나 친족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의 집에 들어가 1880년, 31세 되던 해까지 개인비서일을 보게 되었다. 이듬해인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조준영(趙準永)․김옥균(金玉均)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안종수(安宗洙)․고영희(高永喜)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이후 1884년 신관제에 의하여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이 그를 주사로 임명하였으나, 그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하여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부아문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이 되었고, 다시 관제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기에 힘썼다. 이해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황권(皇權)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서도 나라의 운명을 걱정,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다가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한편, 1902년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을 때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 초대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 또한 1925년 제1회 전국기자회 의장으로서 한국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1927년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3월 29일 운명하였다.

  • 김옥균의 모습

    김옥균 (金玉均, 1851~1894)

    김옥균은 공주 출신 김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7세 때 당숙 김병기(金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1세가 되던 1861년 양부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되자, 양부를 따라 강릉으로 가서 16세까지 율곡사당(栗谷祠堂)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김옥균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학문뿐만 아니라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 예능부문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874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국내에서 개화당의 세력 확장에 진력하는 한편,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하여 1881년 음력 12월 일본에 건너갔다. 그곳에서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하였다. 이후 개화의 필요성을 느끼며『기화근사(箕和近事)』라는 글을 편찬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승정원 우부승지,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 이조참의, 호조참판, 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등의 요직을 거쳤다.

    19세기 말은 풍운의 시대였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 운현궁에서 울분의 나날을 보낼 즈음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청년 정객들이 주도하는 개화파가 조정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심한 간섭을 받게 된다. 임오군란의 진압을 위하여 파견한 3천명의 군대를 그대로 진주시키고,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갔다.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化)하기 위한 간섭정책인 셈이었다. 청나라는 자주근대화정책이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고 개화당을 탄압하였고, 재집권한 명성황후 수구파들도 이에 야합하였다. 임오군란 후 김옥균은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고문이 되어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리고 수신사 일행을 먼저 귀국시키고 서광범과 함께 더 체류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유학생들을 선발해 보내도록 하여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다음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김옥균은 1883년 6월 다시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제3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국채(國債)를 모집하려 하였다가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김옥균은 조선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로 성장하여야 나라의 완전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나라와의 사대관계 폐지, 양반제 폐지를 비롯하여, 관료제도의 개혁, 근대적 군사제도 실시를 추진했다.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 등 산업발전을 위한 복안을 제시하였으며, 형사행정의 개혁, 인구조사 실시, 복제 개선, 단발시행, 위생개혁, 종교의 자유, 서양 근대문물 수입을 위해 학교 설치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화정책을 서두를수록 청나라와 수구파와의 정치적 갈등이 첨예해져, 정변(政變)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한 다음 개화사상과 주장을 실천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한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하기로 계획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에서 한규직(韓圭稷) 등 수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제거하면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후 이재원(李載元:국왕의 종형)을 영의정으로, 홍영식(洪英植)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가 출범하였다. 김옥균은 호조참판으로 재정권을 장악하였고, 모든 상황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5일 저녁부터 6일 새벽까지 회의를 열어 혁신정강을 제정하고, 6일 오전에는 국왕의 전교 형식으로 공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날 오후 3시에 청군 1,500명이 무력개입을 시작하였고, 결국 개화당의 집권이삼일천하(三日天下)로 막을 내렸다. 김옥균은 재기를 기약하면서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일본정부는 김옥균을 귀양을 보냈다가, 북해도(北海道)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 이후 김옥균은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하였고, 1894년(고종 31)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동화양행 객실에서 암살당하였다.

  • 이남규의 모습

    이남규 (李南珪, 1855~1907)

    이남규는 1875년(고종 1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883년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올랐다. 1885년 홍문관교리에 임명되고, 그뒤 부수찬․수찬 등을 지내면서 대일전쟁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그는 안동부관찰사를 역임하다가, 사임한 후 고향에서 을사늑약에 맞서 상소를 올리는 등 나라 잃은 괴로움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홍주의병이 1906년 5월 11일(음력 4월 18일) 홍산에서 기병하여 서해지방을 평정할 때 1천 명이 넘는 부대가 되었다. 5월 19일 홍주성에 입성할 때는 대부대로 성장했는데, 이때 이남규는 선봉장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대장 민종식(閔宗植)은 서울 양반으로 정산에 은거해 있다가 기병하였다. 홍주의진 형성에도 이남규가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홍주전투 후에도 그는 민종식을 은신하거나 홍주의진의 제기를 도모하는 등 중심인물이었다. 홍주성 전투는 20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세영(李世永)을 중심으로 전투조직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실전 경험이 없는 이남규는 편제되지 않았다. 11월의 예산읍 공격 계획은 일진회의 습격을 받고, 이남규와 아들 충구(忠求), 함께 모의하던 곽한일(郭漢一)․박윤식(朴潤植)․이석낙(李錫樂)이 함께 체포되어 공주 감옥으로 끌려 갔다. 이남규 부자는 온갖 고문을 받다가 1907년 초에 풀려났지만, 일제는 홍주의병의 뿌리를 뽑기 위해 1907년 9월 26일(음력 8월 19일) 이남규 부자 등을 체포하였다. 일제는 온양 송악 평촌 냇가에 이르러 이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이남규를 향한 칼날을 막기 위해 아들 이충구(李忠求)와 두 종이 몸으로 칼날을 막다가 함께 죽었다. 이남규는 나라에 대한 충으로, 아들 충구(忠求)는 아버지에 대한 효로, 교군들은 주인에 대한 의로 순절하였다하여 이들은 ‘삼절(三節)’로 높이 일컬어지고 있다.

    이남규의 죽음에 대해 1907년 대한매일신보를 통하여 전국에 보도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의로운 죽음은 꽃다운 교훈으로 퍼져 나갔다. 이남규의 생가와 묘는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에 있다.

  • 이응로의 모습

    이응로 (李應魯, 고암(顧菴), 1904~1989)

    고암 이응로 화백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에게 서화를 배웠으며,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며 화단에 나왔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남화(南畵) 2대가 중 한명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에게 사사받았고 혼고(本鄕)연구소 등에서 서양화를 연구하는 등 근대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1945년 해방을 맞은 고암은 김영기, 장우성 등과 함께 '단구(檀丘)미술원'을 조직해 식민잔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국회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8년 프랑스 평론가 자크 라센의 초청으로 파리로 건너갔고, 이듬해 독일에서 순회전을 가진 뒤 1960년 파리에 정착했으며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한 파케티화랑과 전속계약을 맺어 1961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전에서 명예대상을 획득하여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고암은 서양미술의 본고장에서 한지와 수묵이라는 동양화 매체를 사용해 스스로 '서예적 추상' 이라고 이름붙인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했다. 이미지는 고대 상형문자를 연상시키지만 한편으로는 풍경이나 동물, 사람으로 읽히기도 한다. 자연과 인간의 움직임을 흔적으로 기록한 일종의 문자로도 볼 수 있는 서예추상은 70년대 문자추상과 80년대의 군상 연작으로 발전해나갔다.
    1989년 꿈에 그리던 고국에서의 초대전(호암갤러리)을 앞두고 파리에서 급서, 예술의 대가들이 묻힌 파리시립 펠 라세즈 묘지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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