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계절, 성지를 걷다
‘천안 성거산성지’
깊은 만추
어디든
시선이 닿아가는 곳 너머엔 벌써 한 해의 끝자락이 도착해 있습니다.
성스러운 흙 위를 걸어보기로 한 날,
11월 16일 오전 성거산에서 만난 하늘입니다. 일상을 벗어나 침잠하는 날들의 자그마한 선물인가 했습니다.
성거산 천주교 순교 성지는 500여미터 거리를 두고 조성된 줄무덤 묘소 두 곳, 그 사이 십자가의 길, 2021년 10월 건립된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성당, 제2 줄무덤으로부터 성당에 이르는 순교자의 길, 그리고 박해를 피해 은신했던 소학골 교우촌 유적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2 주차장에서 하차 후, 제1 줄무덤으로부터 순례를 시작합니다.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해 이름이 밝혀져 있는 5인의 소학골 출신 순교자 외 무명 순교자 및 신앙자들의 유해가 38기 묻혔다고 하나 시신들이 겹쳐 있어 실제로 안장된 순교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1886년 병인박해 당시 체포된 조선인 평신도들에 대한 조선정부의 방침은 배교(背敎)방면과 순교 사이의 선택이었으며, 외국인 사제들의 경우는 국외추방과 순교 중 택일이었다 합니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 순교를 선택했는데, 박해가 계속된 5년여에 걸쳐 순교자 수가 전국적으로 8,000에 달했다 합니다. 당시 조선에 있던 프랑스 사제 12명 중 9명이 체포당해 순교했습니다.
▲ 제2 줄무덤 입구에 서 있는 조형물, ‘순교자’
제2 줄무덤에도 36기의 묘봉이 있으나 실제 안장된 순교자는 더 많다고 합니다. 1, 2 줄무덤 합쳐 본래 107기였다는 증언들이 있다고 합니다. 소학골과 주위 인근 교우촌에서 병인박해 때 모두 23명이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제1 줄무덤의 5인 외 상당수가 서울포도청에서 처형되었고 신원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무명순교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 순교자의 길에 놓인 바위 이끼. 세상으로부터 숨어 이 외길을 오르내렸던 이들의 아득한 평화와 고된 숨결이 느껴집니다.
성당내 예배소에서 정면으로 내다 보이는 성거산. 이 풍경 한 컷을 잘라내기 위해 이 건축물이 세워진 듯 느껴집니다. 150년의 시간을 뚫고 4각 평면 속에 정제된 자유로운 공간이 온 산중에 가득합니다.
성당 옥상에 놓여 있는 고문 형틀이 당시 순교자들이 겪은 수난과 고통, 그럼에도 굴하지 않는 신앙의 기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당 왼쪽 작은 동산에 서 있는 성모마리아 상
있음과 없음이 같은 존재입니다.
시선을 맞추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스치기만 하여도 내 삶 만분의 일이 정화되었음을
성당으로부터 갈대이엉 초가로 형상을 복원해 놓은 비밀 교우촌까지 길을 따라, 죽음에 이르는 예수의 수난 마지막 장면들의 석재 부조들이 열지어 있습니다.
성거산 교우촌 이름이 교회사 기록에 나타난 것은 1839년 기해박해 직후였습니다. 그러나 성거산 자락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동쪽자락에 위치한 소학골은 1800년 초 신유박해(1801) 이후 신자들이 하나 둘 이주해 와 정착하였는데 처음부터 정주형 교우촌이자 신자공동체 형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방 안에 놓인 침상을 보면 이곳에 은신했던 서양 사제들이 절로 떠오릅니다.
특히 1866년 최악의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여름철마다 소학골에 머물며 사목활동을 담당했던 프랑스인 칼래 신부가 고국에 보낸 편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비밀신앙공동체 초기 개척지인 이 소학골 교우촌에 대한 묘사가 압권입니다.
“소학골은 독수리 둥지마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여 찾아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아주 좋은 피신처입니다. 들짐승처럼 사방에서 쫒기는 선교사도 이곳에서만은 평화로이 맑은 공기를 마시며 어느 누구에게도 들킬 염려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여기저기 절경을 찾아 눈앞에 듬뿍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또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사진 속 창으로 캄캄한 밤하늘을 응시하던 먼 이방인의 슬픈 고립과 환희가 동시에 느껴집니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애달픈 ‘믿음’과 ‘신앙의 유산’ - 이제 순례를 마치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먼 공간을 건너 맞은편 산 중턱, 이곳을 지키듯 두 팔을 벌려 내려다보는 커다란 예수님의 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순간 저는 나도 모르게 기도하듯 중얼거렸습니다.
온 누리에 자비가 가득하길.
천안 성거산 성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위례산길 394( 입장면 호당리 2)
성거산성지 병인박해 150주년 기념성당
* 취재일: 2024년 11월 16일
#11월 16일 천안 성거산 성지 방문